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천주교 평양교구 (문단 편집) === 약사 (略史) === 교황 [[비오 11세]]는 1927년 3월 서울대목구로부터 평안남북도 일원을 관할하는 하는 평양지목구를 분리·설정하였다. 1944년 한국천주교회 교세통계에 따르면, 당시 평양교구는 본당 19개, 공소 106개, 교육기관 22개, 복지기관 17개를 운영하였으며 신자 수는 26,400명에 달했다. 1931년에는 서포성당에 교구청을 새로 지어 특이하게 주교좌본당과 교구청이 분리되었다. 메리놀 외방전교회 미국인 선교사들이 교구의 기초를 닦았으나 1942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일제에 의해 추방되었다. 그 후 1943년 홍용호 주교가 노기남 주교에 이어 두 번째 한국인 주교로서 평양교구장에 임명되었다. 해방 당시 북한지역에는 주교 3명, 성직자 80여 명, 수도자 180여 명이 본당 사목뿐 아니라 유치원과 학교, 병원, 양로원과 고아원을 운영하는 등 교육ㆍ의료ㆍ복지 사업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1944년 한국교회 교세통계에 따르면 당시 북한 지역 신자수는 모두 5만 7천여 여명으로, 당시 한국 천주교 전체신자 수 179,114명 중 31.8%에 해당했다. 그러나 1948년 북한에 공산정권이 들어서서 교회가 운영하던 시설들을 몰수하는 등 조치를 취하자 북한교회는 어려움을 겪는다. 1949년 5월 평양교구장 홍용호 주교가 납치되었으며, 이후 다른 많은 성직자들과 수도자들도 체포되거나 행방불명되었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에는 사제가 한 명도 없었으며, 교회 재산은 모두 몰수되었다. 관후리주교좌본당 자리에는 현재 평양학생소년궁전이 들어서 있다. 현재 평양과 함흥 교구 관할 지역은 로동당 통일전선부에서 각 종교 마다 조직한 어용 종교 단체 중에서 조선 '''카'''톨릭교협회 에서 담당한다고는 하는데 그 존재 자체가 허접하고 대외 활동 조차 없는 실체가 의심되는 단체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